고려시대의 역사적인 전투인 귀주대첩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귀주대첩은 1019년 3월 10일에 일어난 전투로, 고려의 상원수 강감찬과 원수 강민첨이 이끈 20만여 명의 고려군이 거란의 소배압을 총지휘관으로 한 10만여 명의 거란군을 귀주에서 크게 무찌른 결정적인 승리였습니다. 이 전투는 고려와 거란의 제3차 전쟁의 마지막 전투로, 거란의 고려 침략을 완전히 저지하고, 고려의 독립성을 확보한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귀주대첩의 배경
고려의 태조 왕건은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거란이 멸망시킨 후,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북진 정책을 국시로 내걸었습니다. 하지만 거란은 고려와 송나라가 연합할 경우, 자신들의 뒤를 칠 것을 우려하여 고려를 속국화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거란은 고려를 3차례 침공하였습니다. 993년에는 소손녕이 이끈 거란군이 패배한 후, 서희가 담판을 벌여 고려가 강동 6주를 획득하였고, 1010년에는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공해 왔으나 별다른 소득 없이 돌아갔습니다. 1018년에는 소배압이 10만여 명의 거란군을 이끌고 다시 고려에 침입하였습니다.
귀주대첩의 과정
거란군은 1018년 12월에 고려의 북부 지방을 침략하였습니다. 고려는 평장사 강감찬을 상원수로 봉하고, 대장군 강민첨을 원수로, 병마판관에 김종현을 임명하여 거란군을 막도록 하였습니다. 고려군은 흥화진, 내구산, 마탄, 신은현 등에서 거란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으나, 거란군은 수도인 개경을 목표로 우회하여 계속 남하하였습니다. 개경에 정찰병을 보냈지만, 개경의 방어가 왕성하다는 첩보를 들은 소배압은 후퇴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추격하는 고려군을 막기 위해 약 300명 정도의 기병대를 배치해 두었지만, 이들은 금교역에서 고려군의 습격에 전멸하고 만들었습니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퇴각하던 거란군은, 연주에서 또다시 강민첨 대장군의 기병에게 대패하였습니다. 며칠 뒤, 거란군은 귀주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상원수 강감찬은 귀주에서 수만의 대군을 이끌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양군은 힘을 다해 싸웠고, 쉽사리 승부가 갈리지 않았습니다. 때마침 개경에서 거란군을 추격하며 올라온 김종현의 철기 기마부대가 거란군의 후진을 습격하여 적을 혼란에 빠뜨렸고, 연주에서 승리한 강민첨 대장군의 기병 1만 4천 명이 정주 방향에서 귀주에 도착해서 거란의 중심부로 전원 돌격하여 고려본진과 거란군을 완전포위 하고 순식간에 섬멸시키니, 거란군은 완전히 참패하고 북으로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원수 강민첨 대장군과 기병이 반령까지 거란군을 추격하여 거란군을 전멸시켰습니다.
귀주대첩의 결과
귀주대첩은 고려의 결정적 승리로 끝났습니다. 거란군은 10만여 명 중에서 생존자가 약 1,000명 미만이었다고 합니다. 거란의 성종은 이 패전에 크게 노하여 소배압에게 사신을 보내어서 ‘네가 적지에 너무 깊이 들어가 이 지경이 되었다. 무슨 얼굴로 나를 만나려는가. 너의 낯가죽을 벗겨 죽이고 싶다’라고 책망하였습니다. 이 귀주대첩이 지닌 가장 큰 의의는 거란의 성종으로 하여금 다시 무력으로 고려를 굴복시키려는 야망을 버리게 한 동시에, 거란이 끈질기게 요구하여 왔던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다시는 요구하지 않게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귀주대첩의 평가
귀주대첩은 고려의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고려의 독립성과 주권을 확보한 전투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고려의 공신각에는 강감찬과 강민첨의 초상이 그려져 있으며, 강감찬은 고려의 국가보위에 큰 공을 세운 역사적인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귀주대첩은 고려의 국력과 무력을 세계에 알린 전투이기도 하며, 고려의 국가정신과 민족정신을 상징하는 전투이기도 합니다.
이상으로 귀주대첩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귀주대첩은 고려의 역사에 길이 남을 무공을 세운 강감찬과 강민첨의 영웅적인 전투였습니다. 고려의 국가보위에 헌신한 그들의 공로를 기리며, 이 글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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