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이야기

임진왜란에서 의병을 이끈 광해군, 그의 삶과 업적은?

by 노블레스캣 2024. 2. 26.
반응형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의병을 이끌고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즉위 후에는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치고,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궁궐과 서적을 복구하는 등 여러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하지만 잦은 옥사와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왕후를 유폐한 일로 인해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에 의해 폐위되었습니다.

광해군


출생과 성장


광해군은 1575년에 태어났으며 선조와 공빈 김 씨의 둘째 아들로 위로는 친형 임해군 이진이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광해군(光海君)에 봉해졌습니다. 어려서 생모 공빈 김 씨를 여의고 부왕의 냉대 속에 자랐습니다. 외할아버지인 김희철마저도 임진왜란 중에 전사하면서 그가 기댈 곳은 없었습니다.

세자 책봉과 임진왜란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가 자식을 낳지 못하자, 어쩔 수 없이 서자 중에서 왕세자를 선택해야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선조는 후궁 인빈 김 씨를 총애했기에 그녀의 아들인 신성군을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선조에게는 장성한 여러 왕자들이 있었으나 임해군, 정원군, 순화군 등은 성격이 흉폭하여 불가하였고, 자질로 따지자면 광해군이 유력했습니다. 그러나 방계승통에 서얼이라는 열등감이 있었던 선조는 광해군이 정비에게서 나온 적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세자 책봉을 계속 미루었습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습니다. 광해군은 함경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군수품과 의병을 직접 모집하고 군량미를 모으는 데에도 힘썼습니다. 임진왜란 동안 세자의 몸으로 부왕을 돕고 전쟁 승리에 적지 않은 공을 세웠으나, 부왕의 인정과 칭찬은커녕 견제와 냉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광해군

왕위 즉위와 정책


1608년에 선조가 죽고 광해군은 34세의 나이로 조선 제15대 군주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의 업적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창경궁, 경희궁, 창경궁을 재건한 것과 ‘신 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 등 소실된 서적 간행에 힘쓴 부분이 있습니다.

또한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쳐 두 나라의 친교를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후금에게는 숭명배금을 내고, 명나라에게는 사신을 파견하고, 두 나라의 공적을 모두 기록하였습니다. 이러한 외교적인 성과로 인해 광해군은 명나라로부터 ‘광해’라는 국호를 받았습니다.

인조반정과 폐위


그러나 광해군은 대북계열을 중용하고 정적을 제거하는 데 집착하였고,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상황까지 만들며 정치적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명과 후금의 전쟁에서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외교적인 성과는 있었으나, 숭명배금 노선을 절대적으로 지키는 신료들의 반대로 국가 행정은 마비되었습니다. 결국 1623년에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에 의해 폐위되었습니다.

폐위된 광해군은 제주도로 추방되었으나, 인조가 그를 동생으로 대우하고, 명나라에도 폐주로 인정받았습니다.  1641년에 제주도에서 사망하였으며, 남양주에 묘소가 있습니다.

광해군은 폐위된 이후에는 패륜자, 혼군(昏君), 폐주(廢主)로 평가되어 왔으나, 현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재조명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조선의 국력을 회복하고, 후금의 침략을 막는 데에 기여했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또한 광해군의 문화적인 업적도 인정받고 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