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천량해전은 정유재란 때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과 벌인 해전으로, 조선 최악의 패전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해전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지휘를 잘못하여 대부분의 전선과 장수들을 잃고 전사하였고, 조선 수군은 궤멸되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칠천량해전의 배경, 과정, 결과에 대해 간단히 요약해 보겠습니다.
칠천량해전의 배경
- 1597년 3월, 임진왜란을 종결시키기 위한 강화교섭이 결렬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등을 이끌고 조선에 재침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유재란입니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하삼도를 점령하라고 명령하였는데, 하삼도를 점령하려면 조선 수군을 무력화시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조선 수군의 핵심인 이순신을 제거하게 되었습니다.
- 이순신은 임진왜란 당시에도 공을 두고 경쟁할 만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의 내부분쟁을 이용하여 일본의 도해 정보를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공격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공격 명령을 수행할 수 없었던 이순신은 돌연 조정에서 파면되고, 대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 원균은 제대로 된 지휘를 하지 않고, 소수의 적을 보고도 도주하거나, 육군의 엄호 없이는 출전할 수 없다고 핑계를 대었습니다. 결국, 도원수 권율이 원균에게 엄한 곤장을 쳐서 출전시켰습니다.
칠천량해전의 과정
- 1597년 8월 26일, 원균은 160여 척의 판옥선과 3척의 거북선을 이끌고 부산포 인근에서 일본 수군을 추격하다가 바람과 파도를 고려하지 않고 적을 추격하다가 12척의 판옥선을 표류하게 해 잃어버리고, 9일에는 오히려 적의 반격을 받아 많은 전선을 잃게 되었습니다.
- 8월 27일, 조선 수군은 가덕도에서 물을 확보하기 위해 내리는데 일본의 기습을 받았고, 원균은 400명의 아군을 버리고 도주하였습니다. 거제도 서쪽의 작은 섬 칠천도 남쪽에 정박했던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에 야습을 당한 이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계속 퇴각하였습니다.
- 원균은 제대로 된 지휘를 하지 않은 채 선상에서 폭음을 하였고, 견내량 혹은 춘원포에서 삼도수군을 상륙하게 한 뒤 반격하지도 않은 채 도주하였습니다. 도주하다가 소나무 아래에 숨어있던 일본군들의 습격을 받아 전사하였습니다.
- 거제 고현성 충청수사 최호와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당황하여 도망칠 궁리만 한 원균과 달리 불리한 상황에서도 용감히 싸웠지만 결국 전사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리포첨사 이응표는 주장인 이억기를 구원하지 않은 채 도주하고 말았습니다.
칠천량해전의 결과
-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거북선 3척 등 판옥선 140여 척을 침몰시키고, 지휘관 포함 2만여 명을 궤멸하였습니다. 일본 수군은 전선 8척을 침몰시키고, 100여 명을 사상하였습니다. 가토 요시아키는 왼팔을 부상하였습니다.
- 칠천량해전의 패배로 조선 수군은 대부분 궤멸되었고, 일본 수군은 하삼도를 점령하는 데 큰 장애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일본 수군은 이후 명나라의 강력한 해상지원을 받은 조선 수군과의 전투에서 연패하게 되었고, 결국 정유재란은 조선과 명나라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칠천량해전은 조선 수군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해전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해전에서 전사한 수군들을 추모하며, 다시는 이런 아픔을 겪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번 포스팅이 여러분에게 유익했기를 바라며, 다음에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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